가족 돌봄 청년: 어른의 역할을 강요당한 아이들

열여섯 살에 아픈 부모의 보호자가 된 아이가 있다.

병원 동행, 약 챙기기, 식사 준비, 동생 돌봄. 또래가 학원을 다니고 친구를 만날 시간에 이 아이는 집안을 책임진다. 학교에서는 아무 일 없는 척 앉아 있다가 집에 오면 다시 보호자로 돌아간다. 도움을 요청할 곳을 모르고, 요청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냥 버티는 것이 일상이다.

영국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아직 공식적인 명칭조차 없다. 존재가 인식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


가족 돌봄 청년이란 누구인가

가족 돌봄 청년은 부모나 형제 등 가족 구성원의 돌봄을 일상적으로 책임지는 18세 미만 청소년을 말한다. 돌봄 대상은 다양하다. 신체 질환, 정신질환, 알코올 중독, 장애를 가진 부모. 어린 형제자매. 치매 조부모.

한국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공식적인 실태조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가족 돌봄 청년이 약 8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의 가족 구조와 복지 공백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가 비슷한 상황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선택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아프거나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돌봄을 맡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치르는 대가

돌봄 책임은 청소년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학업이다.

밤늦게까지 가족을 돌보고 수면이 부족한 상태로 학교에 간다. 과제를 할 시간이 없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렵다. 결석이 잦아지고 성적이 떨어진다. 교사는 이유를 모른 채 태도 문제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거나 진학을 단념하는 경로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적 고립도 심각하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고,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 어렵다. 가족의 병이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창피하거나 가족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또래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면서 정서적 고립이 깊어진다.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만성적인 스트레스, 불안, 우울. 자신의 욕구보다 가족의 필요를 항상 우선하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른이 되기 전에 이미 소진된 아이들이다.


왜 이 문제가 보이지 않는가

가족 돌봄 청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이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 가족 문제를 외부에 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족이 분리되거나 시설에 가게 될 것에 대한 불안. 도움을 요청하면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침묵을 만든다.

둘째, 주변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학교 교사, 지역사회 복지사가 신호를 알아채려면 먼저 이런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가족 돌봄 청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낯설다.

셋째, 제도가 없다. 발견해도 연결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마땅치 않다.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가 각각 분리되어 있어 가족 전체를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체계가 부족하다.


영국의 영 케어러 제도에서 배울 것

영국은 1995년 케어러법을 통해 가족 돌봄 청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원 의무를 명시했다. 학교 내 영 케어러 담당 교사 제도, 전문 지원 단체, 돌봄 부담 경감을 위한 대체 서비스 연계가 체계적으로 운영된다.

한국은 아직 이 개념을 제도 안에 담지 못했다. 첫 단계는 실태 파악이다. 얼마나 많은 청소년이 이 상황에 있는지 조사하고, 이들을 발굴할 수 있는 학교와 지역사회의 체계를 만드는 것. 지원보다 발견이 먼저다.

아이가 가족을 돌보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것들을 포기하면서 돌봄을 감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국가가 보지 못하는 사이 아이들이 어른의 몫을 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